
돈이 비싸지면 좋은 일 아닌가 싶으실 거예요. 내 지갑에 있는 돈의 값이 오르는 거니까요. 그런데 스위스 중앙은행은 지난 15년 동안 자기 나라 돈이 비싸지는 걸 막으려고 애를 썼어요. 그것도 아주 큰돈을 들여서요.
스위스 사람이 다 손해 보는 선택을 왜 했을까요. 여기서 절상이라는 말을 한 번만 짚고 갈게요. 우리 돈의 값이 다른 나라 돈에 비해 오르는 걸 절상이라고 해요. 반대로 값이 내려가면 절하라고 하고요.
돈이 비싸지면 무엇이 곤란해지나
스위스는 시계와 정밀기계, 의약품을 만들어 파는 나라예요. 수출이 먹고사는 길이에요. 그런데 프랑이 비싸지면 이 물건들의 가격표가 저절로 올라가요.
시계 공장이 값을 한 푼도 안 올렸다고 해봐요. 프랑이 두 배로 비싸지면, 그 시계를 사려는 미국 사람은 두 배의 달러를 내야 해요. 공장은 가만히 있었는데 손님 눈에는 값이 뛴 거예요. 그러면 손님은 옆 나라 시계를 봅니다.
그럼 공장이 값을 내리면 되지 않나요?
내릴 수는 있어요. 다만 그만큼 덜 벌게 돼요. 직원 월급과 재료값은 프랑으로 나가는데 받는 돈만 줄어드니까요. 결국 누군가는 손해를 봅니다.
막는 방법은 시장에 자기 돈을 푸는 것
물건 값은 흔하면 내려가고 귀하면 올라가요. 돈도 똑같아요. 그래서 프랑을 싸게 만들려면 프랑을 흔하게 만들면 돼요.
중앙은행은 프랑을 찍어낼 수 있어요. 그 프랑으로 시장에서 유로와 달러를 사들여요. 시장에는 프랑이 넘치고 중앙은행 금고에는 외국 돈이 쌓입니다. 이렇게 쌓인 외국 돈을 외환보유액이라고 불러요. 나라가 들고 있는 외국 돈 저금통이라고 보시면 돼요.
스위스 중앙은행은 2011년 9월에 이 일을 공식적으로 선언했어요. 유로당 1.20프랑 아래로는 내려가게 두지 않겠다며, 필요하면 외국 돈을 무제한으로 사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2015년 1월에 그 약속을 거둬들였어요.
실제로 그랬는지 우리 데이터로 확인해봤어요
말로만 들으면 그럴듯해도 숫자가 따라오지 않으면 소용없어요. 세계은행 자료로 스위스의 환율과 외환보유액을 나란히 놓아봤어요.
스위스 외환보유액 (GDP 대비 %)
세계은행 외환보유액(금 포함)을 같은 해 GDP로 나눈 값이에요.
2008년에 GDP의 12.9%였던 저금통이 2020년에는 143.3%가 됐어요. 나라가 1년 동안 벌어들인 것보다 많은 외국 돈을 쌓아둔 거예요. 발표가 있었던 2011년 전후로 숫자가 급하게 꺾이는 게 보이실 거예요.
숫자로 번역하면
2000년에는 1달러를 바꾸려면 1.689프랑이 필요했어요. 2024년에는 0.880프랑이면 됐고요. 같은 1달러를 사는 데 프랑이 절반만 있어도 되니, 그만큼 프랑이 비싸진 거예요. 24년 동안 92% 올랐어요.
그 사이 중앙은행이 사 모은 외국 돈은 9,094억 달러예요. 인구 900만 명으로 나누면 한 사람당 1억 4천만 원이 넘습니다.
한국도 이렇게 하나요?
규모가 많이 달라요. 2024년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4,180억 달러로 금액만 보면 스위스의 절반쯤이에요. 그런데 경제 크기로 나누면 GDP의 22.3%예요. 스위스는 93.8%고요. 같은 저금통이라도 통이 얼마나 큰지는 나라마다 이렇게 다릅니다.
그래서 순위표를 이렇게 읽으시면 돼요
세계 외환보유액 국가 순위를 보면 인구 900만 명짜리 스위스가 4위로 큰 나라들 사이에 끼어 있어요. 처음 보면 이상하죠. 이제는 이유를 아실 거예요. 그 숫자는 스위스가 부자라서가 아니라, 자기 돈이 비싸지는 걸 막으려고 오랫동안 외국 돈을 사들인 결과예요.
같은 이유로 스위스는 다른 순위표에서도 위쪽에 자주 나와요. 세계에서 물가가 비싼 도시 순위에 스위스 도시가 여럿 올라 있고, 1인당 GDP 순위에서도 상위권이에요. 달러로 바꿔 재는 순위표에서는 돈이 비싼 나라가 유리해집니다.
순위표의 숫자는 그 나라가 잘하고 있다는 뜻일 때도 있고, 재는 자가 그렇게 생겼다는 뜻일 때도 있어요. 둘을 갈라 보는 것이 순위를 제대로 읽는 방법이에요.
데이터 출처
- 외환보유액·GDP·환율
- World Bank Open Data. 외환보유액 FI.RES.TOTL.CD(금 포함), GDP NY.GDP.MKTP.CD, 환율 PA.NUS.FCRF
- 최소환율 발표
- 스위스 국립은행(SNB) 공식 발표. 2011년 9월 도입, 2015년 1월 폐기
GDP 대비 비율은 세계은행 원자료를 우리가 직접 나눠 계산했어요. 원자료는 World Bank와 SNB에서 확인하실 수 있어요. 중앙은행이 왜 그렇게 했는지는 SNB이 스스로 밝힌 내용만 옮겼고, 그 밖의 해석은 넣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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